나이키의 탄생(2) : 나이키 에어와 에어 조던 1의 탄생 *운동화 시장 1위를 탈환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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경제·사회 & 생활 이야기/잡학다식

나이키의 탄생(2) : 나이키 에어와 에어 조던 1의 탄생 *운동화 시장 1위를 탈환하다.

by 학식과 구내식당 사이 2024. 2. 16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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 나이키는 원래 업계 꼴찌였다.


✅1970~80년대 나이키는 신발 시장에서 거의 꼴찌와 다름이 없었다. 당시, 신발 시장의 1, 2위는 아디다스와 컨버스였는데 나이키가 기회를 잡는 계기가 생긴다. 

✅미국에 조깅 붐이 불었을 때 조깅은 스포츠가 아니라고 취급했던 아디다스는 기존 마케팅에서 변화 없이 특별한 대처를 하지 않았다.

✅그러나 나이키는 기민하게 조깅화를 출시하여 대중들의 호응을 얻었다. 피트니스 열풍이 불었을 때에도 나이키는 기민하게 반응했으며 1976년 브랜드 광고를 공격적으로 하며 성장한 나이키니는 1980년 기업공개에 이어 상장한다.

✅이 사이 1979년 나이키는 최초의 '에어(Air)' 운동화를 출시했다. 에어가 최초로 도입된 운동화는 '에어 테일윈드 79(Air Tailwind 79)'였다. *'에어 포스 1(Air Force 1)'은 '에어(Air)' 유닛이 최초로 도입된 '농구화'.

에어 테일윈드(좌)와 에어포스1(우)

 

 

 기업 상장 이후 나이키는 브랜드 쇄신이 필요했다. *에어 조던의 탄생


✅나이키가 조깅화로 큰 호응을 얻었지만, 농구화 영역은 여전히 아디다스와 컨버스가 강세였다. 나이키는 전통 스포츠 업계에 진입해 브랜드 쇄신을 꿈 꾸며 농구화 부서를 새로 만든다. 농구화 부서는 매년 유망주를 찾아다녔지만, 탑 랭커 유망주들은 보통 아디다스나 컨버스를 찾아갔다.

✅그러던 중 마이클 조던의 에이전트였던 '데이비드 포크'는 마이클 조던의 잠재력을 알아보고, 중력을 거부하고 하늘을 나는 사람이라며 여러 브랜드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.

✅마찬가지로 나이키 농구화 부서의 스카우터였던 '소니 바카로'는 마이클 조던을 눈 여겨봤으며, 그 과정에서 조지 레이블링', '필 나이트' 등 많은 사람들이 의견을 조율하며 조던을 영입하게 된다.

✅나이키는 열악한 환경에서 조던의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알아보고 스카웃 예산을 조던 한 명에게 올인하기로 했는데 당시에 마이클 조던은 아디다스 광이었기에 나이키는 후보에도 없었다.

 

✅그러나 나이키의 끈질긴 설득 + 아디다스 당시 경영진이 여러 문제가 있던 상황 + 이미 슈퍼스타가 많았음 + 키가 큰 빅맨을 더 원했음. 또한, 나이키가 농구화 이름에 '에어 조던'이라고 칭하기로 결정 + 에어 조던에 자신의 이름을 허락하는 대신에 연간 제품 판매 수입의 5% 받는 것을 받아들인다.

에어 조던 1을 신은 마이클 조던

 

 

 에어 조던 1으로 나이키는 농구화에서도 업계 탑이 된다.

 

✅당시 나이키는 엄청난 결정을 한 것이며인데 이후 계약 이후 에어 조던은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게 되고 단숨에 아디다스를 더욱 추월하게 된다. *에어 조던 1 출시한 해 1,564억 원의 매출을 올린다.

✅나이키는 견고하게 미국 신발 시장 1위를 차지하게 되고 지금도 농구를 잘 몰라도 사람들은 조던을 알고 있다. 특히 한국에선 슬램덩크의 북산의 상징으로 나오며 에어 조던 브레드는 '북산의 컬러'로 여전히 인기가 많은 모델.

✅시간이 많이 지난 만큼 에어 조던 1은 80~90년대에는 최고의 기술로 만들어진 농구화였으나 현재는 상징성이 클 뿐. 농구화로써는 기능이 좋지 못하다. 농구는커녕 러닝도 하면 힘든 신발이라 지금은 그냥 상징성과 패션화다.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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